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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춤의 여왕

봉춤의 여왕

作者: 生如如花 | 来源:发表于2016-04-14 12:32 被阅读0次

    韩语写了一篇自,同也是韩语课的作

    竟是得,用另一种语言,可以表另外一自己,只自己欣,不求人看

    今日就做一自私的作者

    哇哈哈

    첫번째기록

    나는2005년에 북경대학교에 입학했다.북경대는 한국에서의 서울대처럼 경쟁이 심한 대학교다.첫날에는 기숙사 동창 네명을 만났다.이름이 천하라고 그녀는 북경시의 이과 수석이었다.유영이란 친구는 호북성 무한시 이과 수석이었다.유라이란 친구가 산동성 이과 입시시험4위였다.나는 우리 영하성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지만 이런 훌륭한 학생들 앞에 심각한 열등감이 생겼다.그래서 고등학교처럼 자신있게 다니는 것이 은근히 불가능할 것이 느껴졌다.

    북경대에서 영어 배치시험이 있었다.중국의 영토가 너무 커서 각 성의 교육자원이 차이가 많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의 영어실력도 큰 차이가 있었다.천하와 유영은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해서 고급반에 들어갔고 유라이는 중급반에 들어갔다.나는 예상대로 저급반에 들어갔다.아마 그 당시의 소극적인 심리 암시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듣기시험을 했을 때 말 속도가 너무 빠르니까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이다.참,어이가 없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는 저급반에 들어갔다.

    사실 그 당시의 나는 영어 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도 얘들보다 못한 것 같았다.나는 미전자공학(Microelectronics)을 전공했으니까 수학,물리,화학까지 다 배워야 했다.중국 학생들이 이과 공부를 진짜 잘했으니까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다행인 것은 나는 공부 고민을 하면서도 노는 방법을 알았고 놀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나는 공부를 꼭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철저히 버리고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물론 공부도 하면서.

    북경대에서 아주 유명한 등산단체가 있다.나는2학년때 그 등산단체에 참여했고 지독한 훈련을 통하여 건강해졌다.또한 이 훈련은 일종의 도전이었기 때문에 완료했을 때 진짜 기쁘고 자심감이 많이 생겼다. 2009년 여름에 나는 북경대학교 등산팀 일원으로 청해성에 있는 옥주봉에 등정했고 중국등산협회가 정한 기준으로 국가삼등운동원 인정을 받았다.나는 공부 잘하는 애들에 비해 공부는 못했지만 잘하는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얘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들었다.고등학교 때부터 한줄세우기 문화의 탓에 평등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었던 나는 대학교에 들어와 생각이 바뀌었다.나는 공부는 그다지 잘 하지 못하지만 친구들은 나보다 운동을 못하기 때문에 서로 여전히 평등하다고 인식했다.이 세상의 평등이 숨겨있는 의미는 다양화인 것이라고 느껴졌고 나의 인생을 더 다양화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나의4년 전의 생각이었다.

    두번째기록

    나는2011년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석사로 졸업했다.북경에 돌아간 지4개월쯤 되어서 직장을 구했다.이것이 내가 태어나고 첫 직장이라서 지독하게 잘하고 싶었다.할 일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열심히 할 마음을 얻었다. 나의 직장은 비정부단체(NGO)이지만 사장님은 은퇴한 정부장관이라서 그 덕분에 복잡하고“고급스러운”일을 하게 됐다.중국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인맥이 중요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사장님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 직원들에게 아주 잘해줬다,어떤 순간에는 우리에게 환성이 나올 정도로.이래서 우리 신입사원들은 늘 유능하다는 칭찬을 받았고 바쁘지만 기쁘게 일했다.

    2012년 여름에는 나는 우리 조직의 일원으로 브라질에 개최된 유엔지속가능한개발대회에 참여했다.이 대회는10년씩 열리고 국제지속가능한개발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우리 팀에서는 중국기업가 네 명이랑 다른NGO리더인 소의란 사람도 있었다.소의씨는 중국에서 소문나는 여성NGO리더로서 인정을 널리 받았다.이 대회를 통해 그녀도 알게 돼서 나에게는 흥분된 일이었다.하지만 회의를 했다가 사장님은 욕심이 생겨 회의비서초(ß무슨 의미?)한테 우리 중국에서 대표적인NGO란 인정을 받고 싶어졌다.따라서 사장님은 동행한 기업가들이랑 소의씨를 동원했고 일하라고 했다.불만이 넘친 기업가들은 브라질 구경도 못했고 우리를 위해 일하고 말았다.불만이 있어도 사장님 앞에서는 잘할 맹세를 했고 진짜 사장님의 말따라 열심히 도와주고 말았다.

    중국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또 다른 회의의 준비에 몰입했다,숨도 못 쉬고.우리가 준비해야 할 회의는 귀양 회의라고했다.귀양 회의는 중국에서 환경보호방면의 최고의 회의 중 하나였다.매년에 귀주성 귀양시에 개최된 회의이고 중앙매체까지 보도될 큰 활동이었다.그래서 참석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우리가 회의를 준비하면서 전화나 부탁을 많이 받았고 미치도록 바빠서 난리가 났다.소의씨도 회의에서 강연을 하려 우리 차장님한테 전화를 몇번이나 했다.차장님은 바빠서 전화를 안 받었기 때문에 소의씨로부터 나에게 전화가 왔다,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인 것을 알면서.나는 예의있게 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갑지기 욕하기 시작했다.브라질에서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았다고 해서 이번 회의도 부정한 대우를 받겠냐고 물었다.오랜만에 쏱어지지 못하는 억울이랑 분노가20분의 전화를 통해 욕했으면서 나에게 전했다.항상 소외씨를 존경했던 나는 그 순간 이 분한테 욕을 들은 것이 진짜 믿을 수 없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지금 기억에도 내가 아는 소의씨는 아니라는 환상이 있을 정도로 충격이 남았다.

    근데 더 억울한 사람은 내가 아닌가?일을 열심히 해도 욕먹은 것이 나의 이 공평이란 믿음을 흔들었다.자세히 생각해보면 누군가 욕하거나 욕먹거나 다 나쁜 일이다.하지만 욕하는 사람은 주동적으로 공격해서 책임이 더 크지 않은가?아니면 욕먹은 사람이 일을 제대로 안해서 욕먹은 것이 자연스러운가?우리는 비즈니스 관계이고 우리 사장님을 욕할 용기가 없어서 대신 나에게 욕한 것인가?나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욕먹은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그래서 전화를 끝난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계속했다.내가 진짜 실망한 것은 욕먹은 것이 아니라 늘 존경하는 선생님이 이유 없이 순진한 사람을 탓한 것이다.선생님이기는 커녕 정말 변덕스러운 악마인 것 같았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의문이 생겼다.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욕을 먹는것이 당연한 것인가?공평한 것인가?

    이것이 나의3년 전의 의문이었다.

    세번째기록

    춤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다.발레나 전통 민족춤을 감상할 때 웬지 고급스러운 느낌이 가득하다.친구끼리 모임에서도 누군가 발레를 춘다면“와”를 외치면서 부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천국에서 와주신 천사처럼,그녀의 한걸음 한걸음까지 우아가 담겨 매력이 풍긴다.앞에서 볼 때마다 나비가 내 두눈앞에 날아가는 듯이,그녀는 웃으면서 예쁜 몸가짐으로 걸어다닌다.이런 것은 발레라는 춤의 품위이나.

    어떤 사람은 발레는 교만한 춤이라고 한다.우아보다는 도도함이란 용어가 발레리나의 자태나 태도를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아닌가?”한 친구는 물어봤다. “아닌가 보다”,내가 답했다.원래 교만을 느낀사람은 자기가 낮은 자리에 머물러서 올라가기 싫어질까 싶다.우물안 개구리처럼 다른 세상의 생존방식을 받기 어려울까 싶다. 이래서 발레의 문제는 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하지만 진정한 문제가 뭔지를 모른다. 이년전에 나는 중국에서 영어선생님으로 일했다.한가한 시간이 많아서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일을 하고 싶게 됐다. “춤?”“대단한 생각을 하셨다”–나는 이렇게 혼자말을 했으나 질문이 또생겼다.어떤 춤?나는 여자로서 잘하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고려했고 봉춤이 정해졌다.왜냐하면 나는 등산 덕분에 힘만 셌기 때문이다.

    나는 봉춤을 배운것이 친구한테 큰 충격을 줬다.내가 있는 인맥권에는 거의 다 명문대 졸이다.봉춤이란 것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그래서 이들은 악의없이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나는 춤으로 돈을 벌 부담감이나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맞장구를 치면서 같이 장난을 했다.물론 춤으로 돈벌 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설레고 흥분하여 춤 교실에 들어갔다.

    봉춤교실에서 같이 춤을 배우는 친구가 많았다.우리 거의 동갑이지만 예들의 학력은 나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나는 신기했으나 진짜 이들과 잘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들었다.나는 부자 딸 아니라서 원래 이런 진지한 환경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우리끼리 춤을 잘 췄고 같이 연습했고 나날이 지내면서 서로서로 진땀이 흘러 존경도 생겼다.내가 특별히 감탄한 것은,봉춤의 매력을 최대하게 포현하기 위해 봉에서 떨어지고 부상까지도 큰 일 아니라는 그녀들의 모습이었다.

    근데 봉춤이란 것이 원래 공사를 하다가 쉬던 일꾼들이 심심해서 만들어진 춤이다.그들은 본격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서 발레의 우아를 감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이래서 봉춤은 처음부터 저급계층의 취향을 맞추려 생긴 춤이었다.섹시할뿐만 아니라 노출을 감수하는 여자만 봉춤자가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점점 확산됐다.아마도 이런 고정관념때문에 현대봉춤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활발하더라도 대중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다.그래서 봉춤자는 발레리나와 부딪치면 기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건전성까지도 잃는다는 느낌이 있다.

    나 이래서 봉춤이 즐거웠다.어느날 교실에 아주 예쁜 모델 하나 왔다.봉춤을 연습했다가 그녀가 짜증을 냈다. “이건 뭐야!”봉에서 거꾸로 하지 못한 그녀가 성이 났다.작은 소리로 욕하면서“일자리 찾지 못해 가난한 여자만 이런 춤을 연습하기로 했다”는 원망이 들렸다.기분이 상해도 욕하지 않은 춤 춘 친구들은 침묵을 했으나 이런 저런 사연으로 교실에서 다가갔다.어이없을 뿐일까.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돈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낮고 춤 추기 밖에 못하는 친구들은 아무리 욕하고 반항해도 이 말에 담겨있는 어두운 사실을 역전할 수 없나 보다.나는 항상 좋은 대학만 있어서 이런 모욕을 당한 적이 진짜 한번도 없는 것 같았다.그 때 취약계층의 한명으로 비웃음 받은 느낌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잘 기억하고 있다.친구들은 분명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다만 봉춤을 출 뿐이다.마찬가지로 나는 주목을 받은 이유는 명문대 졸일 뿐인가?나도 잘한 것이 없고 다만 공부를 했을 뿐이다.나는 발레리나인 척하고 이렇게 살아왔구나.웬지 너무 슬프다–나 때문일 뿐만 아니라,내 봉춤 친구들 때문일 뿐만아니라, 25살에 세상을 다시 한번 인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인가 보다.

    프랑스 정치철학가 루소(Rousseau)작품을 잘 배웠던 나는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착각해 온 것을 인정하게 됐다,그 순간에는.진실인 듯 진실 아닌 그 평등이란 원칙이 현실생활 중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다.춤 뿐만아니라 우리 학교까지 전공까지도 똑같다.비즈니스 스쿨에 다닌 사람들은 고고학자보다는 뭐가 더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것 같다.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도“경제학과”전공하고 싶은 사람이 많다.하지만 다들 이렇게 인식한다면 강세계층이랑 취약계층도 생길 것인가 싶었다.말 한마디도 없이 그냥 서로 전공을 소개한 후에 은근히 계층이 성형되는 것 같다.나는 얼마나 주관적으로 평등을 믿더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불평등 현상이 더 많은가 보다.나 원래 이런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이다.

    이것이2년 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다.

    네번째기록

    2013년에 나는 미국에 왔다.법률을 전공한다니까 친구한테“와” “부럽다”란 소리를 많이 들었다.사실은 나는 어쩔 수 없이 법대를 다니게 됐다.왜냐하면 직장 옮기고 싶었던 나는법대밖에 갈 곳이 없었기때문이다.처음에는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 대학에서 다녔다.나는 북경대나 케임브리지대에서 동창들보다 공부 잘하지 않은 학생이었지만 적어도 항상 명문대 졸 사람들을 만났다.에모리에서 명문대 졸 출신인 학생이 적어서 나도 욕심이 생겼다.그래서 그 때는 더 좋은 대학에 편입할 생각을 했다.1년 전에 누구든지 다 평등하다고 주장했던 나는 결국 심리낙차때문에 에모리를 떠나게 됐다.그것이 아주 풍자적인 일이 아닌가?

    나는 에모리에서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법률회사(law firm)에 일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일한 꿈이었다는 사실이다.미국에서 법률회사가 졸업생한테 줄 연봉이 무려16만 달러나 되기 때문이다.하지만 사람마다 다양한 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얘기를 나누고“직장 찾고 싶다”는 말을 듣고 또 듣고 나서 나는 짜증이 났다.나는 그런 얘기만 듣고 싶지 않았다.세계적으로 법률 불공정 때문에 감옥으로 간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미국에서도 헌금정치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많지 않은가?지금은 학생이지만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은가?좋은 발명을 통해 뭘 변화하고 싶은 것이 없는가?왜 하필 얘기 하자마자 취직 걱정만 하는가?나는 종종 불만이 생겨 공부를 미치도록 열심히 해서 하버드로 편입했다.그와 동시에 큰 법률회사 직장도 찾았다,또 아주 풍자적으로.

    그래서 나는 언행이 상반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평등하다고 하고 나서 더 좋은 학교에 갔다;큰 회사에 다니고 싶은 동창을 비판하고 큰회사에서 일하게 됐다,부러운 눈빛을 즐기면서.나는 행동으로 평등이란 이상을 버렸나본다.왜냐하면 평등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잘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특권인가 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때의 나는 몇 년전의 나에 비해 많이 달라지고 현실적인 사람이 돼 버렸다.

    이것은1년 전에 나의 생각이었다.

    다섯번째기록

    새해에 케네디스쿨에 있는 중국친구가 파티를 열고 날 초대해줬다.위챗(Wechat)에서 그룹을 보니 익숙한 사람 이름이 나왔다.그 이름이“심연기”였다.연기양은 중국에서 되게 유명세를 타는 젊은 작가다.프린스턴학부 출신,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그녀가 자세히 연구를 했고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을 출판했다.뿐만 아니라 그녀의 작품은 대중의 입맛을 잘 맞추고 우리 잊을 뻔한 역사를 스토리처럼 잘 기록했다.나도 당연히 그녀의 작품을 읽었다.읽으면서 감탄을 했다.역사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우리가 이미 잊은 어떤 인물의 기쁨,슬픔,한숨,희망,좌절,분노,원망까지 잘 묘사하고 표현하는 그녀의 작품이 내 마음을 흔든 적이 몇번이나 있다.

    내가 제일 즐겁게 읽었던 작품이 미국불교연구를 설립한 학자에 대한 이야기다.그 학자가 불교연구에 큰 공헌을 했고 만년에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아마 불교 연구자체가 냉문전공이라서 관심해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이 사람을 잊거나 잊기를 선택하거나 이 사람의 노력과 성공을 부인할 수는 없는 법이다.따라서 이런 역사로 스토리를 서술하는 연기양은 대단하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보며 이번은 좀 알게 됐으면 좋다는 작은 소망이 들었다.

    그날 내가 일찍 도착했고 다른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눴고 연기양을 기다리고 있었다.한시간 후에 그녀가 왔다.아는 친구랑 인사를 좀 했고 나 같은 새로운 얼굴을 알 마음이 없었는지 모르는 사람들과 얘기를 전혀 안 했다.그래서 나는 좀 가까이 갔고 인사를 좀 해보고 싶었다.그들의 대화했던 내용을 잘 듣고 얘기를 건네는 시도를 몇 번 한 후에 소심한 소리로 그녀가 이별인사를 했다,날 보는 것도 없이.모르는 사람한테 알아볼까 봐 설렁설렁 떠나갔다.

    사실은 내가 누구의 작품을 즐기고 굳이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나도 가끔 수필을 쓰니까 날 알고 싶은 사람도 조금 있다.다 만날 리가 없잖아.그래서 좀 아숴워해도 이것이 교만이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글로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그녀가 원래 사생활의 한정이 애매하기때문이다.나는 간섭이나 방해를 안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에 대한 존경이라고 믿는다.앞으로도 이렇게 글만 읽어가겠다,그녀가 날 만날 마음이 없다면.

    연기양은 글을 나보다 잘 쓰는것이 사실이다.근데 누구보다 더 잘하는 것이 불평등의 기반이 아니라고 믿어 왔다.하지만 나 같은 팬을 만나기 싫어하는 유명한 작가들은 평등 대신 불평등을 포용하는 것인가?당연히 아니다.대세 가수가 팬을 다 알 필요가 없듯이,유명한 사람들은 우리를 다 알 리가 없다는 말이다.어떤 면에서 보면 나도 그녀의 명예를 좇아 그녀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그래서 남의 의지를 존경해주는 것은 나의 믿음을 지키려면 꼭 해야하는 일이다.

    이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마지막기록

    나는 항상 평등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나는 원래 북경 출신도 아니고 상해 출신도 아니고 광동 출신도 아나라서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충격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나는 행북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적어도 우리 성이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같은 성의 시골아이들은 영어교육까지도 부족한데 어떻게 우리 같은 도시애들이랑 경쟁할 수 있는가?적은 교육자원을 받은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랑 똑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살다보니까 이런 질문을 안 하게 됐다.나는 교육 불공평의 수익자로 그런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환상이 있었기때문이다.하지만 삶이 단지 교육인가?불공평은 우리 살고 있는 세상을 시시각각 통제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다른 분야에서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다.그러나 웬지 모르게 나는 항상 평등 이야기에 예민하고 아무런 형식으로라도 토론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진짜 좋아하는 드라마 에피소드가 있다.이 에피소드를 보자마자 감동하고 반성을 한다.드라마 이름이‘청담동 앨리스’이고 주인공의 이름이 한세경이다.한세경 양은 상류사회에 들어가고 싶어서 전략적으로 기회를 만들고 권력이 있는 사람을 만났다.근데 사장님임에도 불구하고 비서인 척하는 남자를 그녀가 좋아하게 됐고,사장님도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슬프게도 가난함을 싫어하는 세경 양은 그 비서의 고백을 거절했다.그녀는 비서가 사장님이라는 사실을 안 후에 가짜 편지를 보냈고 사장님의 비서를 좋아하게 된다고 했다.누구한테 은밀하게 밝힌 후에 세경양의 심리 활동을 묘사하는 에피소드가 나의 잊지 못한 에피소드다.이 바닥에 정략결혼이나 이익결합은 드물지 않은 반면에 가난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누구에게 접근하는 것은 죄가 됐다.왜 그런가?세경양은 왜 가난한 사람들만 착하게 살 의무가 있고 부자집 사람들은 마음대도 살아도 되냐고 했다.이 질문이 아주 논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의무도 다르고 권리도 다른 것이 평등인가?

    현실생활은 평등인지 아닌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케임브리지에서 석사를 했을때 졸업논문을 써야 했다.나는 좋아했던 철학학자이며 프랑스의 전위교부장을 맡던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Tocquevillle)에 대한 논문을 썼다.특히 토크빌이 쓴'미국의 민주주의'와'구체제와 프랑스혁명'이란 책들에 담겨있는 평등관념에 대해 토론을 해봤다.평등이란 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고 믿은 토크빌은 평등에 대해 경계를 하면서도 평등이 저항할 수 없는 홍류로 인정했다.사람들은 자기 평등한 존재로 인정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부족할 것이다.또는 이 사회가 좋고 나쁨 구분없이 평등하게 대처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예를 들어 예술분야 중에 발레도 있고 봉춤도 있다.둘을 평등하게 인식한다면 그 누구도 황당스러울 수 있다.왜?상식적으로 비교하면 발레가 봉춤보다 더 훌륭한 춤이기 때문이다.그래서 평등이란 것이 아마 훌륭함을 막고 평범함을 장려할 것이라서 우리 사회가 경계할 만한 개념이다.

    평등에 대한 글 쓴 사람들은 많다.내가 읽기 즐겨운 작가중에 전이군이란 북경대 교수님이 있다.몇년전에 전교수님은“절묘한 이기주의자”제목으로 글을 발표하셨다.무슨 뜻이냐면 우리 대학교들은,특히 북경대 같은 좋은 대학교는 절묘한 이기주의 학생들을 키우고 있다는 말이다.이들은 똑똑하고 생각이 치밀하다.이들은 연기를 잘하고 호흡을 맞출 줄 안다.이들은 스시듬을 잘 이용할 줄 알고 자기의 목적을 이룰 줄 안다.이들은 이상도 없고 믿음도 없어서 유일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것는 개인재산이랑 공중의 인정이다.이들은 권력을 장악하면 보통사람보다 더 크게 해로울 수 있다.이들은 평등을 믿지 않고 불평등만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평등이 더 좋은가,아니면 불평등이 더 좋은가?나의 삶에도 생각에도 이 문제에 대해 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금 깨닫게 되었다.근데 평등이랑 불평등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는 평등파에 들겠다.나란 사람이 진짜 웃기는 것이 뭐냐면,어떻게 추구할 줄도 모르는 채 추구할 각오부터 먼저하는 것이다.책을 이렇게 많이 읽어도 나이를 이렇게 먹어도 나는 앞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참 기가 막히게.발레를 추고 싶지만 봉춤도 너무 즐거웠다;하버드에 편입했지만 에머리에서의 경험도 이제 와서 보면 얼마나 소중한 지 모른다;큰 도시에 머물렀지만 시골의 순수도 감상한다.평등해야 한다는 말이 고급계층의 특권일지라도 나는 어디에서든지 평등을 추구하고 공평하게 사람을 대처겠다.나는 일을 잘하고 싶지만 그것을 불평등이 아니라고 믿고 돈,사회지위,출신,종교 구분없이 누구든지도 잘해줄 소망이다.왜냐하면 나는 발레의 공주로 태어나지 않아서 대신 봉춤의 여왕이 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이것은 나의 꿈이고 선택이다.

    如花2015.3.11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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